한나라 이후 통일왕조의 수도를 따라가면 중국의 경제·국방·권력 지도가 보인다

[한국관세신문=정도현 기자|광저우.호치민]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성벽 위에 서면 한 도시가 품고 있는 시간의 두께가 먼저 다가온다.
지금의 성벽은 명나라 때 축조된 것이지만, 도시 북서쪽에는 전한(前漢)의 장안성(長安城) 유적이 남아 있다. 남쪽과 동쪽으로는 수·당 시대 장안의 흔적이 현대 시안의 도로와 지명 속에 이어진다.
허난성(河南省) 낙양(洛陽)으로 가면 풍경이 달라진다. 황허(黃河) 중류와 낙하(洛河)가 만나는 중원에서 후한 황제들이 나라를 다스렸고, 불교는 백마사(白馬寺)와 용문석굴(龍門石窟)을 중심으로 중국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개봉(開封)에서는 황제의 궁궐보다 운하와 시장이 먼저 보인다. 남경(南京)은 장강(長江)의 경제력을 등에 업은 남방의 정치 중심이었다. 북경(北京)에 이르면 궁궐과 관청, 제단과 시장이 하나의 남북 중축선 위에 배치된다.
한나라 이후 중국 통일왕조의 수도는 한곳에 머물지 않았다.
전한의 장안에서 후한의 낙양으로, 수·당의 장안에서 북송의 개봉으로 이동했다. 명나라는 남경에서 출발해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고, 청나라는 그 북경을 이어받았다.
수도의 이동은 황제 개인의 취향이나 풍수만으로 결정된 일이 아니었다.
식량은 어디에서 생산되는가. 세금과 군량은 어떤 길로 운반되는가. 가장 큰 군사적 위협은 어느 방향에서 오는가. 황제가 어디에 있어야 제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
중국 수도의 역사는 이 질문에 대한 시대별 답이었다.
장안(長安), 관중의 요새에서 세계도시로

오늘날 시안은 산시성의 성도다. 고대 장안은 위수(渭水)를 끼고 펼쳐진 관중평원(關中平原)에 자리했다.
남쪽에는 진령산맥(秦嶺山脈)이 있고,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과 동관(潼關), 남쪽으로는 무관(武關)이 놓였다. 농업생산이 가능한 평야와 외부 공격을 막을 수 있는 관문을 함께 갖춘 지역이었다.
한 고조 유방(漢高祖 劉邦)은 기원전 202년 한나라를 세운 뒤 관중을 정치 중심으로 삼았다. 전한의 장안은 오늘날 시안 도심의 북서쪽에 있었고, 수·당의 장안은 그보다 남동쪽에 새로 건설됐다. 이름은 같았지만 시대에 따라 도시의 위치와 구조는 달랐다.
장안이 세계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한 무제(漢武帝·재위 기원전 141~87년) 때였다.
한 무제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張騫)을 서역으로 파견했다. 장건의 원정은 한나라가 중앙아시아와 직접 접촉하는 계기가 됐고, 장안은 훗날 실크로드라고 불리게 된 동서 교류망의 동쪽 출발점으로 성장했다.
유네스코는 장안과 낙양에서 중앙아시아 제티수 지역으로 이어진 약 5000㎞의 교통망이 기원전 2세기부터 형성돼 무역과 종교, 과학기술과 문화의 교류를 촉진했다고 평가한다.
한 무제 시대에는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 흉노 원정을 이끌었다. 사마천(司馬遷)은 장안 조정에서 중국 최초의 본격적인 기전체 통사인 『사기(史記)』를 집필했다.
중국이 오랜 분열을 끝내고 다시 통일된 것은 수 문제 양견(隋文帝 楊堅)이 589년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키면서였다. 양견은 이에 앞서 583년 기존 한대 장안성의 남동쪽에 대흥성(大興城)을 건설했다.
대흥성은 남북과 동서의 도로가 바둑판처럼 교차하고 궁성과 황성, 주거구역인 방(坊)과 시장이 구분된 계획도시였다. 618년 당나라가 건국된 뒤 대흥성은 다시 장안으로 불렸다.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재위 626~649년)의 정관지치(貞觀之治)와 당 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재위 712~756년)의 개원성세(開元盛世)를 거치며 장안은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로 성장했다.
중앙아시아 상인과 서역 출신 관리, 불교 승려와 여러 종교의 신자들이 장안에 모였다. 현장법사(玄奘)는 629년 무렵 인도로 떠났다가 645년 장안으로 돌아와 불경 번역에 힘썼다. 이백(李白)과 두보(杜甫), 왕유(王維)는 장안을 오가며 당 제국의 번영과 불안을 시로 남겼다.
그러나 755년 안록산(安祿山)이 일으킨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장안의 운명을 바꿨다. 756년 반란군이 장안을 점령하자 현종은 쓰촨으로 피란했다. 당은 수도를 되찾았지만 지방 절도사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전과 같은 중앙집권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904년 군벌 주전충(朱全忠)은 당 소종(唐昭宗)을 낙양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907년 당이 멸망하면서 장안은 중국 전체를 다스리는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
오늘날 시안은 한·당 문화와 실크로드의 출발지로 알려진 역사도시인 동시에 대학과 연구기관, 항공우주·전자정보·방위산업이 밀집한 서북지역의 중심도시다.
중국에서는 관중 사람들의 말투가 힘차고 직접적이며 의리와 실용을 중시한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이를 주민의 타고난 성격으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 관중의 농경·군사적 역사와 면 중심의 식문화, 건조한 기후가 비교적 소박하고 직선적인 생활문화를 형성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낙양(洛陽), 천하 한가운데 놓인 중원의 수도

낙양은 허난성 서부, 낙하 북쪽에 있다. 중국에서 강의 북쪽을 양(陽)이라 부르기 때문에 ‘낙수 북쪽의 도시’라는 뜻에서 낙양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동쪽으로는 화북평원, 서쪽으로는 관중, 남쪽으로는 장강 유역, 북쪽으로는 산시고원으로 연결된다.
장안이 산과 관문에 둘러싸인 방어형 수도였다면 낙양은 사방의 인구와 물자에 접근하기 좋은 교통형 수도였다.
왕망(王莽)의 신(新)나라와 농민반란으로 전한의 질서가 무너진 뒤 유수(劉秀)는 25년 황제에 올랐다. 그가 후한 광무제(後漢 光武帝)다. 광무제는 낙양을 수도로 삼고 분열된 중국을 다시 통합했다.
후한 시기 낙양은 정치 중심인 동시에 학술·기술·종교의 도시였다.
반고(班固)는 『한서(漢書)』를 편찬했고, 장형(張衡)은 천문과 지진 관측에 업적을 남겼다. 채륜(蔡倫)은 105년 무렵 제지 기술을 개선한 인물로 기록됐다.
백마사는 후한 명제(明帝) 때인 1세기 후반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며 중국 불교 전래를 상징하는 사찰이 됐다. 낙양 남쪽 이수(伊水) 연안의 용문석굴은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한 5세기 말부터 당대까지 집중적으로 조성됐다. 유네스코도 낙양이 북위 말과 당 초기의 수도였으며 이 시기에 용문석굴 조성이 활발했다고 설명한다.
후한 말의 낙양은 혼란의 중심이기도 했다.
189년 군벌 동탁(董卓)이 정권을 장악했고, 반동탁 연합군의 압박을 받자 190년 황제와 주민을 장안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낙양의 궁궐과 민가가 불타 도시가 크게 파괴됐다.
265년 사마염(司馬炎)은 서진(西晉)을 세우고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 서진은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삼국시대를 끝냈지만, 황족 간 권력투쟁인 팔왕의 난(八王之亂)으로 급속히 약화됐다. 311년 한조(漢趙)의 군대가 낙양을 함락한 영가의 난(永嘉之亂)은 서진 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수 양제 양광(隋煬帝 楊廣)은 605년 낙양을 동도(東都)로 대규모 건설했다. 대운하망도 낙양을 중심으로 남북의 수계를 연결하는 방향으로 조성됐다. 강남의 곡물과 물자를 황허 유역으로 끌어오기 위한 선택이었다.
당나라에서도 낙양은 장안과 함께 동도 또는 동경의 역할을 했다. 무측천(武則天)은 690년 국호를 주(周)로 바꾸고 낙양을 신도(神都)라 불렀다. 낙양은 장안의 보조 수도를 넘어 한때 실질적인 정치 중심이 됐다.
오늘날 낙양은 용문석굴과 백마사, 수·당 낙양성 유적과 모란으로 알려져 있다.
중원 사람들은 검소하고 현실적이며 생존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황허의 범람과 전쟁, 왕조교체와 인구 이동을 반복해서 경험한 역사와 관련된 인상이다. 다만 허난 사람을 둘러싼 일부 통념에는 지역차별도 섞여 있다. 객관적으로는 중원 농경사회의 실용성과 오랜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지역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적절하다.
개봉(開封), 성벽보다 운하와 시장이 키운 수도

허난성 동부의 개봉은 황허 남쪽 평원에 자리한다.
북송 때 정식 명칭은 동경개봉부(東京開封府)였고 변경(汴京) 또는 변량(汴梁)으로도 불렸다.
개봉은 장안이나 낙양처럼 산과 관문에 의지한 방어형 수도가 아니었다. 넓은 평원에 자리해 외적의 공격과 황허의 범람에 취약했다.
그럼에도 북송이 개봉을 수도로 유지한 이유는 물류였다.
후주(後周)의 장군 조광윤(趙匡胤)은 960년 진교역(陳橋驛)에서 황제로 추대돼 송나라를 세웠다. 송 태조(宋太祖)가 된 그는 개봉을 수도로 유지하고 지방 무장세력을 억제하는 문치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다.
당 후기로 갈수록 중국 경제의 중심은 장강 이남으로 이동했다. 수도와 군대를 유지하려면 강남에서 생산된 곡물과 세금을 북쪽으로 운반해야 했다.
개봉은 변하(汴河)를 비롯한 수로를 통해 회하(淮河)와 장강 유역, 황허 수계로 연결됐다. 유네스코는 중국 대운하가 곡물과 전략물자를 운반하고 수도 인구를 먹여 살린 제국 내륙교통의 중추였다고 평가한다.
북송의 개봉은 황제와 관료만을 위한 도시가 아니었다. 상점과 음식점, 여관과 시장이 발달했고 야간 상업도 활발했다.
장택단(張擇端)의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는 수로와 다리, 선박과 수레, 상점과 행인이 뒤섞인 북송 수도의 도시생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개봉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은 포증(包拯·999~1062년)이다. 한국에서는 포청천으로 알려진 그는 개봉부윤을 지냈으며, 후대 연극과 소설을 통해 공정한 관리의 상징이 됐다. 다만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은 실제 기록에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진 것이다.
왕안석(王安石·1021~1086년)은 송 신종 때인 1069년부터 신법(新法)을 추진했다. 국가재정과 국방을 강화하려는 개혁이었지만 사마광(司馬光) 등 반대파는 국가의 과도한 개입과 사회 혼란을 우려했다. 개봉의 조정은 11세기 중국 최대의 정책논쟁이 벌어진 무대였다.
번영은 1127년 끝났다.
여진족 금(金)나라 군대가 개봉을 함락하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 황족과 관료들을 북방으로 끌고 갔다.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다. 북송은 멸망했고, 황족 조구(趙構)는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웠다.
오늘날 개봉은 인근 정저우(鄭州)에 비해 경제 규모가 크지 않지만 북송 문화와 야시장, 서민 음식문화로 강한 정체성을 유지한다.
개봉 사람들은 외지인과 쉽게 말을 섞고 손님을 음식으로 대접하는 정서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랜 시장·교통도시의 전통과 관련된 이미지다. 개봉은 운하와 상업, 반복된 수해와 재건의 역사가 만든 현실적이고 생활밀착적인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남경(南京), 장강의 경제력이 세운 남방 수도

남경은 장쑤성(江蘇省) 서남부, 장강 하류에 자리한다.
동쪽에는 종산(鐘山)이 있고 서쪽과 북쪽으로 장강이 흐른다. 산과 강이 도시를 감싸는 지형 때문에 예부터 ‘호거용반(虎踞龍盤)’, 호랑이가 웅크리고 용이 서린 형세라고 불렸다.
남경은 삼국시대 오(吳)와 동진(東晉), 남조의 송·제·양·진이 수도로 삼아 ‘육조고도(六朝古都)’로 불린다. 그러나 이 왕조들은 중국 전역을 통일하지 못했다.
한나라 이후 통일왕조의 수도라는 기준에서 남경의 핵심 시기는 명나라 초기다.
가난한 농민 출신이었던 주원장(朱元璋)은 원 말의 혼란 속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는 1356년 당시 집경(集慶)이라 불리던 남경을 점령해 응천부(應天府)로 이름을 바꿨고, 1368년 황제에 올라 명나라를 세웠다.
명 태조 홍무제(明太祖 洪武帝)가 된 주원장은 남경을 수도로 삼아 대규모 성곽과 궁성, 관청을 건설했다. 원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낸 뒤 호적과 토지, 군사제도를 정비했다.
1380년에는 재상 호유용(胡惟庸)을 숙청하고 재상제도를 폐지했다. 이후 명나라 황제는 중앙행정을 이전 왕조보다 직접적으로 장악하게 됐다.
1398년 홍무제가 사망하자 손자인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했다. 건문제가 지방 황족의 세력을 줄이려 하자 북경의 연왕 주체(燕王 朱棣)가 반란을 일으켰다. 1399년부터 1402년까지 이어진 정난의 변(靖難之役)이다.
1402년 연왕의 군대가 남경을 점령했고, 주체는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했다.
영락제는 자신의 정치·군사 기반인 북경을 중시했다. 1406년부터 자금성 건설을 추진하고 대운하를 정비한 뒤 1421년 북경을 공식 수도로 삼았다.
남경은 수도 지위를 잃었지만 남경육부(南京六部)를 비롯한 관청이 남아 명나라의 남쪽 수도 역할을 계속했다.
영락제 시대 정화(鄭和)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인도양 원정을 이끌었다. 정화의 함대는 남경 일대의 조선시설과 장강 수운을 기반으로 준비됐다.
남경은 이후에도 중국사의 격변기마다 정치 중심으로 다시 등장했다.
태평천국은 1853년 남경을 점령해 천경(天京)으로 불렀다. 1912년 쑨원(孫文)은 남경에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했고, 국민정부는 1927년 남경을 수도로 삼았다.
1937년 12월 일본군이 남경을 점령한 뒤 민간인과 포로를 상대로 대규모 학살과 성폭력을 저질렀다. 희생자 규모의 세부 추정에는 차이가 있지만 광범위한 전쟁범죄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국제적으로 확인돼 있다.
오늘날 남경은 장강 이남에 있으면서도 상하이·쑤저우의 오어(吳語)가 아니라 북방관화 계통의 남경 방언을 사용한다. 북방 인구가 여러 차례 남하했고, 수도와 군사도시 역할을 하며 각지 인구가 유입됐기 때문이다.
남경 문화에는 강남의 생활방식과 북방계 언어문화가 함께 나타난다. 남경 사람의 성격을 온화하다거나 자존심이 강하다고 단정하기보다 남북 인구의 이동과 수도 경험이 혼합적 도시문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편이 객관적이다.
북경(北京), 북방을 지키며 남방의 경제력을 끌어온 수도
북경은 화북평원의 북쪽 끝에 있다.
서쪽과 북쪽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동남쪽으로 넓은 평야가 열린다. 만리장성의 주요 관문과 가까우며 몽골고원과 만주, 화북평원을 연결한다.
북경이 수도가 된 것은 중국의 경제 중심이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남쪽의 경제력을 대운하로 끌어올리면서 북방 국경을 황제가 직접 통제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쿠빌라이 칸(忽必烈)은 1260년 대칸에 올랐고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정했다. 그는 옛 금나라 중도(中都) 인근에 새 수도 대도(大都)를 건설했다.
원 대도의 도시계획은 후대 북경 중축선의 기반이 됐다. 유네스코는 북경 중축선이 원나라가 대도를 건설한 시기 시작됐으며, 명·청대를 거쳐 궁궐과 제례시설, 행정·공공건축이 더해졌다고 평가한다.
명 태조 주원장은 남경에 수도를 두었지만, 영락제 주체에게 북경은 자신의 권력 기반이자 북방 방어의 전진기지였다.
영락제는 1406년 자금성(紫禁城) 건설을 시작했다. 궁궐은 1420년 완성됐고 1421년 북경이 명나라의 공식 수도가 됐다.
북경 천도는 권력자의 개인적 선택만은 아니었다.
명나라가 가장 경계해야 할 세력은 북쪽 몽골고원에 있었다. 황제가 북경에 머물면 군사 동원과 변경 지휘가 쉬워졌다. 반면 수도의 식량은 강남에 의존해야 했다. 대운하를 복구하고 조운을 정비해야 했던 이유다.
북경은 북방의 군사 중심과 남방의 경제력을 운하로 연결한 수도였다.
1449년 명 영종(明英宗)은 몽골 오이라트 원정에 나섰다가 토목보(土木堡)에서 패배해 포로가 됐다. 황제가 적에게 사로잡힌 초유의 사태였다.
조정 일각에서는 수도를 남쪽으로 옮기자는 주장도 나왔지만 병부상서 우겸(于謙)은 북경 사수를 주장했다. 명군은 북경 방어에 성공했다. 이 사건은 북경이 위험한 접경 수도인 동시에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1644년 농민반란군 지도자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에 입성하자 숭정제(崇禎帝)는 경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 장수 오삼계(吳三桂)는 청군을 관내로 끌어들였고, 청나라는 같은 해 북경을 수도로 삼았다.
강희제(康熙帝), 옹정제(雍正帝), 건륭제(乾隆帝) 시대 청나라는 북경을 중심으로 중원과 만주, 몽골, 티베트, 신장을 연결하는 다민족 제국을 운영했다.
자금성은 명·청 두 왕조의 최고 권력 중심으로 5세기 가까이 사용됐다. 유네스코는 자금성을 1416년부터 1911년까지 중국 최고 권력의 중심이었던 공간으로 평가한다.
북경은 제국의 중심이면서 외세 침략의 현장이기도 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圓明園)을 파괴했다. 1900년 의화단사건 때에는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했다.
1912년 청이 멸망한 뒤에도 북경은 한동안 중화민국의 수도였다. 국민정부가 1928년 남경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북경은 북평(北平)으로 개칭됐다. 1949년 다시 북경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같은 해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됐다.
오늘날 북경 토박이 문화는 흔히 경미문화(京味文化)라고 불린다.
북경 사람들은 말과 유머, 풍자가 풍부하고 정치와 세상 이야기를 즐긴다는 이미지가 있다. 그러나 현대 북경은 중국 전역에서 사람이 유입된 초대형 도시다. 토박이 북경인과 신중국 성립 이후 이주한 관료·군인·연구자, 최근 유입된 청년과 노동자의 생활방식은 서로 다르다.
북경 특유의 말맛과 수도 시민의 정치적 관심을 도시문화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이를 모든 주민의 성격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항주(杭州)는 왜 빠졌나
중국의 대표적인 고도를 이야기하면서 항주를 빼놓을 수 없다.
북송이 멸망한 뒤 송 고종 조구(宋高宗 趙構)는 남쪽으로 이동했고, 1138년 임안부(臨安府), 오늘날의 항주를 사실상 수도로 확정했다.
남송의 임안은 장강 이남의 경제력과 해상무역을 기반으로 번영했다. 악비(岳飛)와 진회(秦檜)의 대립, 주희(朱熹)의 성리학, 육유(陸游)와 신기질(辛棄疾)의 시가 이 시대를 대표한다.
그러나 남송은 화북을 금나라에 내준 채 중국 남부를 통치했다. 이 글은 한나라 이후 중국의 비교적 넓은 지역을 통일한 왕조의 수도를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항주를 주요 목록에서는 제외했다.
같은 이유로 남경도 오·동진·남조의 수도였던 시기보다 통일왕조인 명나라 초기 수도로서의 역할에 초점을 맞췄다.
수도 이동은 중국 경제 중심의 남하였다
한나라 이후 수도의 흐름을 지도 위에 놓으면 중국 국가의 무게중심이 어떻게 변했는지가 보인다.
전한의 장안은 관중의 농업과 산악 방어, 서역 진출을 기반으로 했다. 후한의 낙양은 인구와 물자가 밀집한 중원과 동부지역에 가까웠다.
수·당은 장안을 주 수도로 삼으면서 낙양을 동부의 물류·행정 중심으로 활용했다. 이른바 동서 양경 체제였다.
북송의 개봉은 변화를 상징한다.
중국 경제의 중심은 장강 이남으로 내려갔지만 정치와 군사의 중심은 여전히 북쪽에 있었다. 개봉은 강남의 곡물과 세금을 운하로 끌어오는 데 유리했기 때문에 수도가 됐다.
명 초기 남경은 강남의 경제력을 직접 배후로 삼았다. 그러나 북방의 몽골 세력을 통제하기에는 지나치게 남쪽에 있었다.
북경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황제와 군대는 북쪽에 두고, 곡물과 세금은 대운하를 통해 남쪽에서 가져왔다. 원·명·청의 북경은 북방의 국방과 남방의 경제력을 하나의 국가체제 안에 결합한 수도였다.
결국 수도 이동은 중국 경제 중심의 남하와 안보 중심의 북상 사이에서 만들어진 균형이었다.
지역문화는 설명할 수 있지만 사람을 단정할 수는 없다
중국에는 지역민의 성격을 규정하는 표현이 많다.
산시 사람은 소박하고 무뚝뚝하다, 허난 사람은 현실적이다, 강남 사람은 섬세하다, 북경 사람은 말이 많다는 식이다.
이런 평가에는 오랜 생활환경에서 나온 관찰도 있지만 지역 간 농담과 편견, 경제적 격차에서 비롯된 차별도 섞여 있다.
관중은 농업과 방어의 지역이었다. 중원은 전쟁과 홍수, 왕조교체를 반복해서 경험했다. 개봉은 상업과 운하의 도시였고, 남경은 남북 인구가 만나는 곳이었다. 북경은 전국의 관리와 군인, 상인과 이주민이 몰려든 수도였다.
이러한 환경은 말투와 음식, 손님을 대하는 방식과 공동체 의식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성격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지역문화는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지역민의 본성을 단정할 수는 없다. 중국의 도시를 이해할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객관성이다.
황제는 떠났지만 수도의 기억은 남았다
오늘날 중국의 수도는 북경 하나다.
그러나 과거의 수도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안에는 한·당 제국과 실크로드의 기억이 남아 있다. 낙양에는 후한의 정치와 불교 전래, 수·당 동도의 흔적이 이어진다. 개봉에서는 북송의 시장과 시민문화가 되살아난다. 남경은 육조와 명나라, 중화민국을 거친 수도의 영광과 전쟁의 비극을 함께 품고 있다. 북경에서는 원·명·청이 만든 중축선 위로 현대 중국의 국가기관이 이어진다.
중국의 옛 수도를 걷는 일은 유적을 둘러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장안에서는 서방으로 문을 연 제국을 만나고, 낙양에서는 천하의 중심을 자처한 중원을 본다. 개봉에서는 황제보다 먼저 깨어난 시장을 만나며, 남경에서는 장강의 경제력이 정치권력으로 바뀌는 과정을 읽는다. 북경에서는 북방을 지키면서 중국 전체를 통제하려 했던 국가의 계산을 마주한다.
왕조는 바뀌었지만 수도를 선택한 이유는 도시의 지형과 교통망, 음식과 말투, 주민들의 생활방식 속에 남아 있다.
중국의 수도사는 황제가 어디에서 살았는지를 기록한 역사만은 아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가 무엇을 두려워했고, 어디에서 세금을 거두었으며, 어떤 길을 통해 사람과 물자를 움직였는지를 보여주는 국가 경영의 역사다.

출처: 한국관세신문 · 정도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