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단체소식/한인컬럼

[정도현의 중국이야기 3] 한국과 중국의 역사,2000년간 전쟁하고 배우고 장사했다

2026년 08월 24일 (월)

한사군에서 수·당 전쟁, 송 상인·원 간섭, 명·청 사행까지
임시정부 품었던 중국, 한국전쟁에선 총 겨눠…1992년 수교 뒤 ‘최대 시장’에서 경쟁자로

[한국관세신문=정도현 기자 | 광저우.호치민]

중국에서 20년 가까이 생활한 경험을 살려 중국 관련 기사를 써오다 보니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한중관계를 이해하려면 눈앞의 정치·경제 현상만 볼 것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이 지난 2,000여 년 동안 어떤 관계를 맺어왔는지를 한 번쯤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가까운 이웃이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전쟁을 치렀다. 적대관계였다고 하기에는 오간 사람과 물자, 사상과 문화가 너무 많다.

고구려는 수(隋)·당(唐)의 대군과 사활을 건 전쟁을 벌였다. 신라는 당과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린 뒤 다시 당과 싸웠다. 고려는 송(宋)의 상인과 서적을 받아들이면서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 몽골의 원(元)과 전쟁과 외교를 반복했다.

조선은 명(明)을 동아시아 외교질서의 중심으로 인정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명군과 함께 일본군에 맞섰다. 그러나 불과 수십 년 뒤에는 청(淸)의 침입을 받아 1637년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면 사람은 다시 길을 오갔다.

북경으로 향한 연행사(燕行使)에는 관리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역관과 상인, 수행원이 따라갔다. 중국의 책과 약재, 안경과 시계, 새로운 학문과 기술이 압록강을 건넜다.

근현대로 오면 관계는 더 복잡해진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上海)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중국 각지를 이동하며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1940년 충칭(重慶)에서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중국인민지원군과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이 전장에서 서로 총을 겨눴다.

그리고 냉전의 장벽을 넘어 1992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은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수교 이후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성장했다. 한국 기업은 중국에 대규모 투자를 했고 중국에서는 한국 드라마와 K팝, 화장품과 음식이 유행했다.

하지만 2010년대 중반 이후 분위기는 달라졌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갈등과 미·중 전략경쟁이 겹쳤다. 기술력을 키운 중국 기업은 한국 기업의 고객이자 협력사에서 세계시장을 놓고 맞붙는 강력한 경쟁자로 변했다.

2천 년을 돌아보면 한중관계를 관통하는 한 가지 특징이 보인다.

너무 가까워 서로를 외면하기 어려웠고, 이해관계가 너무 크게 얽혀 있어 늘 편안할 수도 없는 관계였다.

한(漢)과 고조선…기원전 108년 첫 대규모 충돌

한반도와 중국 대륙 국가 사이의 초기 대규모 충돌 가운데 하나는 한 무제(漢武帝)와 위만조선의 전쟁이다.

기원전 109년 한나라는 위만조선을 공격했다. 약 1년간의 전쟁과 위만조선 내부의 분열 끝에 기원전 108년 왕검성이 함락됐다.

한나라는 이후 낙랑군(樂浪郡)·진번군(眞番郡)·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고 현도군(玄菟郡)을 두었다. 이른바 한사군이다.

한사군의 정확한 위치와 영역, 지배 방식은 한국 고대사에서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져왔다. 모든 군현을 하나의 방식으로 단정하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다.

다만 낙랑군이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상당 기간 존재하면서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의 정치·경제·문화 접촉 통로 가운데 하나가 됐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설명이다.

철기와 화폐, 한자문화와 중국계 물품이 유입됐고 토착사회와의 교역도 이뤄졌다.

정복과 지배가 있었지만 동시에 기술과 물자, 문화가 이동했다.

한중관계의 두 얼굴은 이미 이때부터 나타났다.

중국이 갈라지자 고구려·백제 외교 공간은 넓어졌다

한나라가 무너진 뒤 중국은 위(魏)·진(晉), 5호16국과 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오랫동안 분열됐다.

이 시기는 한반도의 고구려·백제·신라가 성장한 시기와 겹친다.

고구려는 중국 북방 정권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필요에 따라 외교관계를 맺었다. 광개토왕과 장수왕 시대에는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장수왕은 427년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이후 고구려는 북중국의 북위(北魏)뿐 아니라 남조의 송(宋) 등과도 외교관계를 맺었다.

이는 어느 한 중국 왕조에 일방적으로 종속됐다기보다 남북으로 갈라진 중국의 국제질서를 활용한 다원외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백제 역시 중국 남조와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541년 백제 성왕은 양(梁)에 사신을 보내 불교 경전과 경전 해설자, 기술자 등을 요청한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 받아들인 불교와 건축·미술 기술은 다시 일본열도로 전달됐다.

당시 동아시아는 오늘날의 국경선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고구려·백제·신라와 중국의 여러 왕조, 북방 세력과 왜가 서로 경쟁하고 동맹을 맺던 다극적 국제사회였다.

수(隋)가 중국 통일하자 고구려와 충돌했다

612년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를 건너던 수나라 대군을 향해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지휘하는 장면. 고구려는 수 양제의 대규모 원정군을 격파하며 침공을 저지했다. | 사진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AI 이미지.
612년 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를 건너던 수나라 대군을 향해 고구려군의 총공격을 지휘하는 장면. 고구려는 수 양제의 대규모 원정군을 격파하며 침공을 저지했다. | 사진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AI 이미지.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동북아의 힘의 균형도 달라졌다.

통일 중국과 고구려라는 두 강대국이 요동과 만주를 사이에 두고 직접 마주하게 됐다.

598년 고구려가 말갈 병력을 동원해 수나라의 요서 방면을 공격하자 수 문제(隋文帝)는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장마와 전염병, 해상 악천후 등으로 원정은 실패했다.

더 큰 충돌은 수 양제(隋煬帝) 때 벌어졌다.

612년 수 양제는 『수서(隋書)』에 113만여 명으로 기록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다. 실제 전투병력과 지원·수송 인력을 어떻게 계산하느냐에는 논의가 있지만, 고대 동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초대형 원정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평양까지 깊숙이 들어왔다가 후퇴하던 수나라 별동대를 살수에서 공격했다.

살수대첩이다.

수 양제는 613년과 614년에도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결정적인 성과를 얻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종종 ‘고구려가 수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반복된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막대한 전쟁비용이 수 왕조의 재정과 사회를 악화시킨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대운하와 궁궐 건설 등 대규모 토목공사, 과중한 부역과 조세, 각지의 반란이 함께 작용해 수는 618년 무너졌다.

당(唐)과 신라, 동맹에서 전쟁으로

618년 당나라가 수를 대신했지만 고구려와의 긴장은 끝나지 않았다.

당 태종 이세민(唐太宗 李世民)은 645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

요동의 여러 성을 점령한 당군은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했지만 끝내 함락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당은 전략을 바꿨다.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던 신라와 손을 잡았다.

660년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신라군과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이 백제를 공격했다. 의자왕이 항복하면서 백제는 멸망했다.

668년에는 고구려가 무너졌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신라와 당의 이해가 충돌했다.

당은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고구려 영역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해 직접 지배를 시도했다. 신라는 이에 반발했다.

670년대 나당전쟁이 벌어졌고, 676년 전후 신라는 당 세력을 한반도 남부에서 밀어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이다.

전쟁은 끝났지만 교류는 끝나지 않았다.

통일신라는 당에 사신과 유학생, 승려를 보냈다. 신라인들은 장안(長安)과 양주(揚州), 산둥반도 일대에서 활동했다.

최치원(崔致遠)은 어린 나이에 당으로 유학해 빈공과에 급제하고 관직생활을 했다.

장보고(張保皐)는 9세기 청해진을 중심으로 신라·당·일본을 연결하는 해상 교역망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구려와 당이 사활을 걸고 싸운 지 몇 세대 지나지 않아 신라인들은 당에서 공부하고 벼슬하며 장사를 했다.

고대 한중관계를 전쟁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발해와 당…등주 공격 뒤 다시 사신과 유학생

8세기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통일신라가 공존했던 남북국시대의 영역을 재구성한 지도. 발해의 5경과 통일신라의 수도 금성 및 5소경을 함께 표시했다. 발해의 강역과 양국의 경계는 시기와 학설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지도와 도시 복원도는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한 AI 이미지.
8세기 전후 동북아시아에서 북쪽의 발해와 남쪽의 통일신라가 공존했던 남북국시대의 영역을 재구성한 지도. 발해의 5경과 통일신라의 수도 금성 및 5소경을 함께 표시했다. 발해의 강역과 양국의 경계는 시기와 학설에 따라 차이가 있다. | 지도와 도시 복원도는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한 AI 이미지.

698년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계 주민을 기반으로 발해를 세웠다.

초기 발해와 당의 관계는 순탄하지 않았다.

732년 발해 무왕은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의 산둥반도 등주(登州)를 공격했다.

그러나 양국 관계는 이후 다시 안정됐다.

당은 발해 왕을 책봉했고 발해는 당에 사신과 유학생을 보냈다. 발해의 행정제도와 도시계획, 불교문화에서도 당 문화의 영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를 발해가 당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는 없다.

발해는 독자적인 왕과 연호, 행정체계와 외교관계를 운영했고 일본과도 직접 사신을 교환했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책봉 관계를 현대의 식민지나 중앙·지방 관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고려와 송(宋)…전쟁보다 장사가 많았다

918년 고려가 건국되고 960년 중국에서 송나라가 출범하면서 한반도와 중국 대륙의 관계에는 다른 흐름이 나타났다.

고려와 송의 관계를 대표하는 단어는 전쟁보다 교역과 문화였다.

개경(開京) 인근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는 국제무역항으로 성장했다.

송 상인들은 배를 타고 고려를 찾았다. 일본과 서역계 상인들도 드나들었다.

고려는 인삼과 종이, 나전칠기·모시 등을 수출했고 송에서는 비단과 서적, 약재·도자기 등이 들어왔다.

사람도 오갔다.

고려 유학생이 송의 국자감에서 공부했고 과거에 응시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송에 들어가 불교 교학을 배우고 많은 불교 서적을 가져왔다.

고려와 송은 정치적으로 국경을 맞대지 않았다.

오히려 고려와 직접 충돌한 것은 북쪽의 거란과 여진이었다.

서희·강감찬, 거란과 싸우면서 송과 교류했다

10~12세기 동아시아에는 송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거란족의 요(遼), 여진족의 금(金)이 중국 북부와 만주지역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고려는 이들과 직접 국경을 맞댔다.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徐熙)는 소손녕과 담판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주장하며 거란과 외교관계를 조정했고, 이후 고려는 압록강 동쪽 지역에 강동6주를 개척했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이 있었고, 1018년 3차 침입에서는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격파했다.

12세기 들어 여진의 금나라가 급성장하면서 국제질서는 다시 바뀌었다.

고려는 처음 여진을 상대적으로 낮은 세력으로 인식했지만, 금이 요를 무너뜨리고 북송까지 압박하자 1126년 금과 군신관계를 수용했다.

고려 외교는 특정 중국 왕조에 일방적으로 끌려가기보다 송·요·금 사이에서 생존공간을 확보하려는 현실적 외교에 가까웠다.

몽골과 30년 전쟁…그 뒤에는 원의 내정간섭

기자는 대몽항쟁의 절정은 삼별초의 항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232년 몽골군의 2차 침입 당시 처인성에서 승장 김윤후와 고려 군사·승려·백성들이 힘을 합쳐 몽골 기병에 맞선 처인성 전투라 생각한다. 처인성 전투는 몽골군 지휘관 살리타이가 전사하고 침략군이 물러난 대몽항쟁의 대표적 승전으로 기록된다. | 사진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AI 이미지.
기자는 대몽항쟁의 절정은 삼별초의 항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232년 몽골군의 2차 침입 당시 처인성에서 승장 김윤후와 고려 군사·승려·백성들이 힘을 합쳐 몽골 기병에 맞선 처인성 전투라 생각한다. 처인성 전투는 몽골군 지휘관 살리타이가 전사하고 침략군이 물러난 대몽항쟁의 대표적 승전으로 기록된다. | 사진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AI 이미지.

13세기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전쟁으로 시작됐다.

1231년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했다.

고려 조정은 이듬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항전을 이어갔다.

1259년 화의가 이뤄질 때까지 약 30년 동안 침입과 항전, 협상이 반복됐다. 전쟁은 고려 사회와 민간에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1270년 고려 조정이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는 진도와 제주로 이동하며 저항했고 1273년 진압됐다.

이후 관계는 더 복잡해졌다.

고려 왕실과 원 황실 사이에 혼인이 이루어졌다. 고려 왕세자가 원의 수도 대도(大都·오늘날 베이징)에 머무는 일이 잦아졌고 원 황실의 공주가 고려 왕비가 됐다.

원은 고려 왕위 계승과 내정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의 병력과 선박, 물자가 동원되기도 했다.

반대로 사람과 문화의 이동도 컸다.

고려인이 원 대도에서 관리·환관·상인·승려로 활동했고 몽골식 의복과 음식, 언어 요소가 고려 사회에 들어왔다. 원에서는 고려의 의복과 생활양식이 유행해 ‘고려양(高麗樣)’이라 불리기도 했다.

1356년 공민왕은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친원세력을 제거하고 쌍성총관부 지역을 되찾으며 반원정책을 추진했다.

고려와 원의 관계는 침략과 저항, 정치적 간섭과 왕실혼인, 문화교류가 동시에 존재했던 시대였다.

명(明)과 조선…조공·책봉 속에도 실리가 있었다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을 세웠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이성계는 명과의 관계 안정에 힘을 쏟았다.

조선은 명 황제를 동아시아 외교질서의 중심으로 인정하고 국왕의 책봉을 받는 사대외교를 운영했다.

하지만 이를 오늘날의 식민지 관계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전근대 국제질서를 현대 개념으로 해석하는 오류가 될 수 있다.

조선에는 독자적인 국왕과 법률, 군대와 조세제도가 존재했다.

조공은 외교의례인 동시에 교역 통로였다.

조선은 인삼과 종이, 모피·말 등을 보내고 명에서는 비단과 서적, 약재와 자기, 문방구 등을 들여왔다.

특히 책의 이동이 중요했다.

조선 지식인들은 중국에서 성리학 서적과 역사서, 의학·과학서를 구했다. 명과의 교류는 조선의 학문과 제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1592년 명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1598년 12월 노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의 진린 제독이 각자의 지휘선에서 조명연합수군의 협공을 지휘하는 모습. 연합수군은 퇴각하던 일본 함대의 항로를 차단하고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AI 이미지.
1598년 12월 노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수군의 진린 제독이 각자의 지휘선에서 조명연합수군의 협공을 지휘하는 모습. 연합수군은 퇴각하던 일본 함대의 항로를 차단하고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AI 이미지.

1592년 4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했다.

부산과 동래가 무너졌고 한양이 점령됐다.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피란했다.

조선은 명에 원군을 요청했다.

명은 처음 소규모 병력을 보냈고 이후 이여송(李如松)이 지휘하는 대규모 원군을 파견했다.

1593년 1월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했다.

명군의 참전은 조선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그러나 명의 목적이 조선만을 위한 희생이었다고 보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일본군이 한반도를 장악할 경우 요동과 명 본토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전략적 이해도 있었다.

명군 주둔 과정에서 조선 백성이 군량과 물자 공급 부담을 졌고 일부 명군의 약탈 문제도 기록에 남아 있다.

1598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조선 지배층에서는 명이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줬다는 의미의 ‘재조지은(再造之恩)’ 의식이 강해졌다.

이 기억은 이후 명과 청 사이에서 조선이 외교적 선택을 해야 할 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청(淸)의 침입…1637년 삼전도에서 항복하다

명나라가 약해지는 동안 만주에서는 누르하치(努爾哈赤)가 여진 세력을 통합했다.

1616년 후금이 성립했다.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충돌을 피하려 했지만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조선의 정책은 친명·배금 쪽으로 기울었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공했다. 정묘호란이다.

양국은 일단 형제관계를 맺고 전쟁을 끝냈다.

후금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청 태종 홍타이지가 같은 해 겨울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침공했다.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버텼지만 결국 1637년 삼전도에서 청 황제에게 항복했다.

조선은 명과의 공식관계를 끊고 청 중심의 조공·책봉 질서로 들어갔다.

병자호란은 조선 지식인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에 대한 의리와, 오랫동안 여진을 문화적으로 낮게 보아왔던 조선 지배층의 인식이 충돌했다.

효종대 북벌론이 등장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현실은 달라졌다.

전쟁이 끝나자 다시 사람들이 북경으로 향했다.

연행사가 가져온 것은 황제의 칙서만이 아니었다

청대 조선과 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제도가 연행사(燕行使)다.

사신단은 압록강을 건너 선양(瀋陽)과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으로 향했다.

공식 목적은 외교였지만 연행은 거대한 정보·지식·무역 네트워크였다.

역관과 상인들은 물건을 거래했고 학자들은 중국의 서적을 사고 현지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홍대용(洪大容)은 중국 학자들과 교유하며 새로운 학문을 접했다.

박지원(朴趾源)은 1780년 청나라를 다녀온 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남겼다.

그는 청의 수레와 벽돌, 도로와 상업을 관찰하면서 조선 사회가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제가(朴齊家)를 비롯한 북학파 역시 비슷했다.

병자호란 직후에는 ‘오랑캐의 나라’였던 청이 18세기에는 일부 조선 지식인이 기술과 상업, 도시문화를 배우려는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정치적 감정과 현실적 학습은 별개로 움직였다.

1882년 이후 조공질서는 청의 직접간섭으로 변했다

19세기 후반 서구 제국주의가 동아시아에 들어오면서 조선과 청의 관계도 크게 변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은 군대를 보내 사태에 개입했다. 흥선대원군은 청으로 압송됐다.

같은 해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의 전문은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표현했다.

이는 이전의 전통적인 조공·책봉관계와 달리 청이 근대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보다 직접적으로 주장하려 한 움직임이었다.

원세개(袁世凱) 등이 조선에 주재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청 상인들의 활동도 크게 확대됐다.

이 시기 인천을 비롯한 항구도시에는 중국 상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인천 차이나타운의 기원도 이 무렵과 연결된다.

그러나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경쟁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폭발했다.

전쟁에서 청이 패배했고,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청은 조선의 ‘독립자주’를 인정했다.

수백 년간 이어진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조공·책봉질서는 사실상 끝났다.

그러나 그 결과가 조선의 안정적인 독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 빈 공간을 일본 제국주의가 빠르게 파고들었다.

일제강점기 중국은 독립운동의 후방이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의 추격과 중일전쟁을 피해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정착하기까지의 이동 경로. 임시정부는 약 8년에 걸친 ‘장정’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가며 한국광복군 창설과 연합국 외교에 나섰다. |  지도와 장면은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AI 이미지
1919년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의 추격과 중일전쟁을 피해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정착하기까지의 이동 경로. 임시정부는 약 8년에 걸친 ‘장정’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이어가며 한국광복군 창설과 연합국 외교에 나섰다. | 지도와 장면은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AI 이미지

1910년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합하면서 국가 대 국가의 한중관계도 끊겼다.

그러나 사람의 관계는 오히려 더 깊어졌다.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만주와 상하이·베이징·난징·광저우 등 중국 각지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김구(金九), 안창호(安昌浩), 이동녕(李東寧), 김규식(金奎植)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중국을 무대로 활동했다.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이후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자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전장(鎭江)·창사(長沙)·광저우(廣州)·류저우(柳州) 등을 거쳐 충칭으로 이동했다.

1940년 충칭에서는 한국광복군이 창설됐다.

중일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중국 국민정부와 한국 독립운동 세력의 협력도 확대됐다.

근대 한중관계에서 중국은 한국인에게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었다.

나라를 잃은 독립운동가들에게 망명지이자 독립운동의 후방이었다.

임시정부 품었던 중국, 한국전쟁에선 총을 겨눴다

1950년 겨울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반도 북부의 산악 전선을 따라 국군·유엔군 방어진지로 진격하는 모습. 중국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 당시 전투 상황을 역사적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한 AI 이미지.
1950년 겨울 6·25전쟁에 참전한 중국인민지원군이 한반도 북부의 산악 전선을 따라 국군·유엔군 방어진지로 진격하는 모습. 중국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 당시 전투 상황을 역사적 자료에 근거해 재구성한 AI 이미지.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해방됐지만 한반도는 남북으로 분단됐다.

1948년 남쪽에는 대한민국, 북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각각 수립됐다.

중국에서는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했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한군이 남침했고 유엔군이 참전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압록강 방향으로 진격하자 중국은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1950년 10월 말부터 중국군은 한국군·유엔군과 본격적으로 교전했다.

청천강과 장진호, 중부전선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중국은 북한 편에서 전쟁에 참여했다.

이 전쟁은 한국인의 중국 인식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사이에는 외교관계가 없었다.

한국은 대만의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유지했고 중국 대륙은 북한의 핵심 우방이었다.

두 나라는 가까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서도 40여 년 동안 사실상 서로 갈 수 없는 이웃으로 지냈다.

1992년 수교…중국은 한국의 최대 시장이 됐다

냉전이 끝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은 북방정책을 추진했고 중국도 개혁·개방과 경제발전을 위해 한국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섰다.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외무부 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처음으로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한 순간이었다.

한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했고, 이에 따라 대만과의 공식 외교관계는 끝났다.

이후 한중관계의 발전 속도는 빨랐다.

1998년 ‘21세기를 향한 협력동반자 관계’, 2003년 ‘전면적 협력동반자 관계’, 2008년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로 관계가 격상됐다.

한국 기업들은 중국으로 몰려갔다.

산둥반도와 톈진·베이징, 상하이·쑤저우, 광둥에 한국 기업의 공장이 들어섰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도 중국 시장으로 향했다.

반대 방향의 이동도 컸다.

중국인 유학생과 근로자, 관광객이 한국을 찾았다.

드라마와 영화, K팝과 게임으로 이어진 한류는 중국에서 거대한 시장을 형성했다.

한중관계 역사에서 이 정도 규모로 일반 시민이 서로의 나라를 오간 시기는 이전에 없었다.

경제는 가까워졌지만 안보는 달랐다

중국 산시성 시안에 위치한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공장 전경. 삼성전자는 시안 사업장에서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다. | 사진=삼성전자 뉴스룸
중국 산시성 시안에 위치한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공장 전경. 삼성전자는 시안 사업장에서 낸드플래시를 생산하고 있다. | 사진=삼성전자 뉴스룸

문제는 경제와 안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한국의 안보동맹은 미국과 연결돼 있었고 중국은 북한과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북한 핵 문제가 악화되면서 이 구조적 차이는 더욱 분명해졌다.

2016년 한국 정부가 주한미군의 사드 배치를 결정하자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은 사드 레이더가 자국의 전략적 안보이익을 침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한국은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체계라고 설명했다.

이후 관광·문화·유통 분야에서 각종 제한이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이를 ‘사드 보복’으로 불렀다.

2017년 양국은 관계 개선 협의를 통해 교류 정상화에 나섰지만 사드 사태는 중요한 사실을 확인시켰다.

1992년 이후 한중관계가 경제적 이해를 중심으로 빠르게 성장했지만 양국의 안보전략까지 같아진 것은 아니었다.

‘고객 중국’이 ‘경쟁자 중국’으로 변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인적교류를 급격히 위축시켰다.

그러나 팬데믹보다 더 구조적인 변화는 미·중 전략경쟁이었다.

반도체와 배터리, 인공지능·통신장비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국가안보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미국은 첨단 반도체와 제조장비의 대중국 수출통제를 강화했다.

중국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둔 한국 기업은 미국의 기술통제와 중국 시장 사이에서 새로운 전략을 요구받았다.

동시에 중국 기업의 기술력은 빠르게 올라왔다.

과거 중국은 한국에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석유화학·기계·배터리 소재를 사가는 거대한 고객이었다.

이제 중국 기업은 전기차와 배터리, 철강과 석유화학, 스마트폰과 가전, 반도체와 조선 등 여러 산업에서 한국과 세계시장을 놓고 경쟁한다.

한중관계의 질문도 달라졌다.

‘중국에 얼마나 더 많이 팔 것인가’에서 ‘중국과 경쟁하면서 어떻게 거래하고 공존할 것인가’로 이동하고 있다.

2025~2026년 다시 관계 복원을 말하다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25년 11월 1일 경북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시 주석의 국빈 방한은 2014년 이후 11년 만이다. 사진=대한민국 대통령실
이재명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025년 11월 1일 경북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시 주석의 국빈 방한은 2014년 이후 11년 만이다. 사진=대한민국 대통령실

냉각됐던 한중관계에는 2025년 이후 다시 고위급 교류가 이어졌다.

2025년 11월 경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11년 만에 한국을 국빈 방문했고 한중 정상회담이 열렸다.

양국은 고위급 소통과 인적교류 확대, 경제협력과 공급망 문제 등을 논의했다.

2026년 1월에는 이재명 대통령이 중국을 국빈 방문해 베이징에서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양측은 한중관계의 복원 흐름을 이어가고 경제·민생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관계 복원’이 곧 1990~2000년대의 한중관계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시에는 한국의 기술·자본과 중국의 노동력·시장이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경제적 보완관계가 강했다.

2026년의 한중관계는 다르다.

한국과 중국은 협력국인 동시에 경쟁국이다.

미·중 전략경쟁과 북한 핵 문제, 대만해협, 반도체 공급망, 서해 문제와 문화 갈등 등 여러 변수가 동시에 얽혀 있다.

2000년 역사가 보여주는 하나의 패턴

한중관계 2000년을 돌아보면 일정한 흐름이 반복된다.

중국 대륙에 강력한 통일왕조가 등장할 때 한반도의 국제환경은 크게 변했다.

한 무제의 팽창은 고조선과 충돌했다.

수·당의 중국 통일은 고구려와의 대규모 전쟁으로 이어졌다.

몽골제국의 팽창은 고려에 수십 년의 전쟁과 장기간의 정치적 간섭을 가져왔다.

명·청 교체는 조선의 외교질서를 뒤흔들었다.

19세기 청의 힘이 약해지자 일본과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경쟁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뒤에는 한국전쟁과 냉전의 단절이 찾아왔다.

반대로 1978년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과 냉전 종식은 1992년 한중 수교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역사의 다른 쪽에는 전쟁만큼 긴 교류의 기록이 있다.

백제인은 중국에서 불교 경전과 기술을 받아들였다.

신라인은 장안에서 공부하고 과거를 봤다.

고려인은 송의 서적과 도자기, 비단을 실은 배를 벽란도에서 맞았다.

조선 사신들은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서 책과 신기술을 구했다.

박지원은 청나라의 수레와 벽돌, 상업과 도시를 관찰했다.

일제강점기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와 항저우, 난징과 창사, 광저우와 충칭에서 독립의 길을 찾았다.

1992년 이후에는 기업인과 유학생, 관광객과 예술인이 그 길을 이어받았다.

전쟁과 외교의 역사 뒤에는 언제나 사람의 이동이 있었다.

그래서 한중관계를 ‘우호의 2000년’이라고만 표현하는 것도 사실과 맞지 않는다.

반대로 ‘중국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한반도를 침략했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 역시 전체를 설명하지 못한다.

싸운 시대가 있었고 손잡은 시대가 있었다.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중국 왕조의 군대와 싸웠고, 중국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면서도 한반도의 왕조는 독자적인 국가체제를 운영했다.

전쟁이 끝나면 상인이 다시 바다를 건넜고, 정치관계가 나쁠 때에도 승려와 학자, 책과 물건은 국경을 넘었다.

이 모순처럼 보이는 두 얼굴이 한중관계의 실제 역사에 더 가깝다.

2026년, 중국을 어느 거리에서 볼 것인가

1998년 처음 중국 땅을 밟은 이후 20년 넘게 중국과 중화권의 변화를 지켜봤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때 한국 기업에 중국은 거대한 시장이었다.

한국의 기술과 자본, 중국의 노동력과 시장이 서로 필요한 시기였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중국 기업은 한국 기업을 따라오는 회사가 아니라 세계시장에서 정면으로 경쟁하는 기업이 됐다. 중국 소비자 역시 한국 제품이라는 이유만으로 지갑을 열지 않는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도 있다.

한반도는 중국 대륙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고 중국 역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다.

고조선과 한나라가 충돌했던 기원전 2세기에도 그랬고, 수 양제의 대군이 요하를 건넜던 612년에도 그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시대에도, 한국전쟁과 냉전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그렇다.

2천 년 한중관계가 주는 교훈은 중국을 좋아해야 한다거나 경계해야 한다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다.

중국을 필요 이상으로 두려워할 이유도 없지만 필요 이상으로 낙관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중국의 힘과 의도, 한국의 국익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읽는 일이다.

어디까지 협력할 것인지, 어디에서 경쟁할 것인지, 어떤 안보 문제에서는 분명하게 선을 그을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친중이냐 반중이냐의 구호만으로 풀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2천 년 동안 한국과 중국 사이를 오간 것은 군대만이 아니었다.

사신과 승려, 유학생과 상인, 책과 도자기, 기술과 사상이 함께 건너갔다.

싸우면서도 배웠고, 배우면서도 경쟁했으며, 전쟁이 끝나면 다시 장사를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2026년 우리가 중국과의 거리를 다시 계산할 때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한중관계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기사제보 : dhjung@kcnews.org
기사제보 : dhjung@kcnews.org

뉴스기사 계속보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