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새 토지법 시행 불과 2년 만에 대수술 추진
‘개별 토지가격’ 없애고 토지가격표·조정계수 중심 개편
보상·수용 빨라질 수 있지만 토지 임대료 상승 가능성도
대기업보다 중소 협력사 파급 더 커…“계약 조건 재점검해야”

[한국관세신문=정도현기자|호치민.하노이]
베트남이 기업 투자와 공장 입지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인 토지제도를 불과 2년 만에 다시 손질한다.
2024년 8월 전면 개정된 토지법을 시행했지만 토지가격 산정의 불확실성과 보상·수용 과정에서의 행정 지연이 계속되자, 일부 시행령을 보완하는 수준을 넘어 법률 자체를 다시 뜯어고치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한국의 대베트남 누적 투자액이 950억 달러를 넘어선 가운데 현지에서 생산기지를 운영하거나 신규 투자를 준비 중인 한국 기업에도 ‘토지 리스크’가 새로운 경영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전자·반도체·디스플레이·자동차부품 등 제조업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국 기업의 베트남 공급망을 감안하면 이번 토지제도 개편은 단순한 부동산 정책 변화에 그치지 않는다. 공장 신설과 증설, 산업단지 임대료, 물류시설 투자비용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정 지연 줄이려 ‘땅값 계산법’ 단순화…임대료 상승 압력으로 이어지나
베트남 정부와 국회는 오는 10월 제16대 국회 제2차 회기 통과를 목표로 토지법 개정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핵심은 토지가격 산정 방식이다.
현재 논의되는 방향 가운데 하나는 개별 사업마다 별도로 산정하던 ‘구체적 토지가격(giá đất cụ thể)’ 제도의 비중을 줄이거나 폐지하고, 지방정부가 정하는 ‘토지가격표(bảng giá đất)’와 ‘토지가격 조정계수(hệ số điều chỉnh giá đất)’를 중심으로 토지 관련 재정 의무를 산정하는 체계로 전환하는 것이다.
사업마다 복잡하게 진행됐던 토지가격 평가 절차를 단순화해 투자 승인과 개발사업 속도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기업 입장에서는 양날의 검이다.
행정절차가 단순해지고 사업 추진 속도가 빨라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토지가격표가 시장가격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할 경우 기업이 부담해야 할 토지사용료와 임대료 역시 상승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노이와 호찌민을 비롯해 박닌·하이퐁·동나이 등 제조업과 외국인 투자가 집중된 지역에서는 토지가격 변화가 산업단지 조성원가와 신규 공장 투자비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결국 베트남 정부가 토지가격을 보다 투명하게 만들고 행정절차를 단축하려는 과정에서 기업들은 과거보다 높은 토지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나타날 수도 있다.
삼성·LG보다 수천 개 중소 협력사가 더 민감하다
베트남에서 외국기업은 한국처럼 토지를 완전한 사유재산 형태로 소유하지 않는다.
베트남의 토지는 전 국민 소유라는 원칙 아래 국가가 관리하고 기업은 토지사용권을 부여받거나 산업단지 개발업체로부터 토지와 인프라를 함께 재임차하는 방식으로 공장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정부의 토지가격 산정체계 변화는 직접 국가로부터 토지를 임차한 기업뿐만 아니라 산업단지에 입주한 외국기업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토지가격과 보상비가 상승하면 산업단지 개발업체의 조성원가가 올라가고 이는 장기적으로 신규 입주기업의 토지 임대료와 인프라 비용 상승 압력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개편의 영향을 더 민감하게 받을 수 있는 곳은 삼성전자·LG전자 같은 대기업보다 수천 개 중견·중소 협력업체들이다.
대기업들은 이미 장기간 사용할 대규모 생산부지를 확보한 경우가 많지만 협력업체들은 주문량과 공급망 변화에 따라 새로운 공장을 짓거나 기존 공장을 증설·이전해야 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다.
특히 최근 중국 생산기지를 축소하거나 공급망을 분산하면서 베트남 진출을 검토하는 한국 중소기업에는 토지비용이 초기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차이나 플러스 원(China+1)’ 전략에 따라 베트남으로 생산거점을 옮기더라도 토지와 인건비, 전력, 물류비까지 함께 상승한다면 베트남 이전의 경제성을 처음부터 다시 계산해야 할 수도 있다.
비용만 오르는 것은 아니다…보상·수용 빨라지면 산업단지 공급에는 호재
이번 토지법 개정이 기업에 부담만 주는 것은 아니다.
베트남 정부가 제도 개편을 서두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토지수용과 보상 문제로 수년씩 지연되는 개발사업을 줄이기 위해서다.
베트남에서는 산업단지와 도로·항만·물류센터 등 대규모 인프라 사업이 투자승인을 받고도 토지 보상과 주민 이주 문제로 착공이 지연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토지가격 결정 기준과 보상 절차가 보다 명확해질 경우 산업단지 개발과 인프라 건설 속도가 빨라지고 신규 산업용지 공급 역시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한국기업 입장에서도 산업단지 공급이 늘고 투자 절차가 빨라진다면 장기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결국 이번 개편은 토지비용 상승 가능성과 행정절차 단축이라는 두 얼굴을 동시에 갖고 있다.
“베트남은 싸다”는 공식도 달라지고 있다
한국기업이 베트남을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인건비와 토지비용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이 세계 제조업 공급망의 핵심 생산거점으로 성장하면서 과거의 공식도 빠르게 달라지고 있다.
2025년 상반기 베트남의 외국인직접투자(FDI) 등록액은 215억1000만 달러에 달했고 이 가운데 제조·가공업이 55.6%를 차지했다.
전자·기계·자동차부품을 비롯한 제조업 투자가 북부와 남부 주요 산업벨트로 몰리면서 산업용 토지에 대한 수요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특히 박닌·하이퐁을 중심으로 한 북부 전자산업벨트와 호찌민·동나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남부 제조업벨트에서는 단순히 ‘저렴한 토지’를 찾는 시대에서 물류·전력·인력·항만 접근성까지 종합적으로 따지는 시대로 넘어가고 있다.
베트남 역시 더 이상 단순한 ‘로우 코스트(low-cost) 생산기지’에 머물지 않고 있다.
반도체와 전자부품, 첨단소재, 데이터센터, 연구개발(R&D) 등 고부가가치 산업을 적극 유치하면서 산업단지의 성격과 토지의 가치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한국기업, 임대료보다 먼저 ‘계약서’를 봐야 한다
베트남에 이미 진출해 있는 한국기업이라면 이번 토지법 개정 과정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단순한 임대료 수준이 아니다.
기존 산업단지 입주기업의 경우 정부가 토지가격이나 토지 관련 부담금을 변경했을 때 그 비용을 산업단지 개발업체가 입주기업에 전가할 수 있도록 계약서에 규정돼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신규 투자기업 역시 공장 부지 가격만 보고 투자 여부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토지사용권의 법적 상태와 남은 사용기간, 토지 보상 완료 여부, 임대료 지급 방식, 인프라 사용료, 토지 관련 정부 부담금 변경 시 추가 비용 발생 여부 등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특히 산업단지마다 계약조건이 다르고 지방정부별 토지가격표와 조정계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점도 주의해야 한다.
같은 규모의 공장이라도 어느 지역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실제 부담하는 토지비용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950억 달러 한국 투자, ‘공장의 바닥’부터 다시 계산해야
베트남 정부는 8월 국회 의견수렴을 거쳐 오는 10월 개정안을 처리한다는 계획이다.
다만 현재 논의 중인 내용은 최종 확정된 법률이 아니다. 개별 토지가격 제도의 처리 방향이나 토지가격표·조정계수 적용 방식, 보상과 수용 범위 등은 국회 심의 과정에서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 한국기업이 투자계획을 급하게 수정할 필요는 없지만 신규 공장 건설이나 증설, 산업단지 이전을 검토하고 있다면 최종 개정 내용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지난 30여 년 동안 베트남 제조업 성장의 가장 중요한 투자국 가운데 하나였다.
삼성과 LG 같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수천 개 부품·소재 협력업체가 함께 들어오면서 북부와 남부 곳곳에 거대한 한국계 제조업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제 베트남 투자에서 ‘값싼 인건비와 토지’만을 전제로 한 계산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인건비가 오르고 산업용 토지 가격이 상승하는 동시에 베트남 정부가 저부가가치 제조업보다 첨단산업과 고부가가치 투자를 선별적으로 유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번 토지법 개정은 그런 변화의 또 하나의 신호다.
950억 달러가 넘는 한국 자본이 들어가 있는 베트남 제조업. 이제 한국기업은 생산원가뿐 아니라 공장이 서 있는 ‘땅의 가격’과 계약조건까지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